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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제주바다 숨비소리74

화산 - 김태일 화산 김태일 뉴스에 태평양 난바다 화산이 터져 오르더군 그 모습이 마치 저 깊은 바다 불길로 뚫고 피어오른 황근꽃이었어 그 높은 시간을 딛고 문득 어느 바닷가 마을 정류장에서 흔들리는 만원 버스 안으로 뛰어오른 바로 그 꽃 그대 2015. 1. 28.
구름 우체국 - 김태일 구름 우체국 김태일 나는 날마다 구름에게 꿈을 맡긴다 슬픔이나 아픔 따위도 뭉텅 잘라내어 쑤셔 넣는다 구름은 우체국이다 구름은 가끔 빗살로 분장된 눈물을 배달하기도 하고 하얀 싸라기로 위장된 한을 배달하기도 하지만 주로 뽀얀 햇살로 포장된 꿈을 배달한다 구름은 이 올레 저 올레 소식을 모으고 또 전한다 외로운 섬마을엔 더더욱 자주 들른다 어쩌다 꿈이 지나가는 소나기에 젖기라도 하는 때에는 불꽃놀이 하는 저녁놀에 휘휘 헹궈 낸 후 수평선 오색 리본으로 장식하여 배달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구름을 품고 꿈을 꾼다 구름은 슬픔이나 아픔을 배달하기도 하지만 늘 꿈틀거리며 꿈 틀처럼 부풀려서 꿈을 배달한다 2014. 5. 31.
석류 석류 김태일 석류, 하면 왠지 서아시아 사막의 석유 냄새가 난다 사암 뚫고 불끈 솟아오르는 석류를 보면 어쩐지 아라비아 아가씨의 글썽이는 눈동자가 생각난다 검은 차도르에 숨어 수줍게 반짝이는 하여 석류가 동맥경화에 좋은가 보다 암흑을 꿰뚫는 석유처럼 어둠을 찢는 눈물처럼 TV 땡볕 속 차도르 틈새 그녀의 눈망울이 젖는다 석류 알알이 석유가 솟구친다 2014. 1. 28.
사라바다 사라바다 김태일 저녁엔 그대 생각에 습관처럼 사라봉에 올랐습니다 거기서 잠시 신화에 기대어 우리의 내일을 기웃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멀리 사라도령의 옷소매가 수평선 스치우며 가뭇없이 넘나들고 성두오모대성당보다도 더 거룩한 기도가 사라바다 하늘로 치솟고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저 신비로운 하늘이나 눈부신 노을이나 우리는 모두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사라바다는 바득바득 그대를 경배해야 할 신상이라고 강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빛나는 몸짓이나 울렁이는 목소리는 거침이 없어서 순간 좀 젖어드는가 싶다가도 신들린 듯 기어이 휘황한 성체를 결단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나브로 한 무더기 구름이 일고 사라바다 서천 꽃밭이 온 누리에 넘실대면서 우리의 전생처럼 자청비 환생 꽃이 다시 활짝.. 2013. 9. 9.
나무 나무 김태일 가만히 날갯짓하는 모습이 저 하늘을 날아오르려는 것일 게다 언젠가 돌담 뒤에서 우연히 훔쳐 보았던 굴뚝새 새끼의 여린 날갯죽지가 둥지 위에 어설피 올라앉아 뒤뚱거리며 날갯짓하듯 오늘도 나무는 불어오는 미풍에 깃털 하나하나를 추스르며 날개를 파닥인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릇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것 아니던가 세상을 향하여 입술을 쫑긋거리고 손이라도 뻗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비 바람 구름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지금도 파도는 언덕을 오르고 저기 들판은 바다로 내닫는다 땅을 뚫고 올라온 여린 싹 하나 언제 비바람 견뎌내며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어 담장 위에 솟대를 세웠나 수상한 구름이 주변을 배회하던가 갑자기 폭풍이 덮쳐오기라도 하는 때에는 수많은 잎새가 하늘을 향하여 주술을 읊는다 아마 저 .. 2013. 8. 26.
구월 구월 김태일 등산하다가 길을 잃었다 이 능선 저 골짝 헤매어 다니다 찾아든 어느 계곡 흘러내리는 시내를 따라 가다 조그마한 호숫가에 다다랐다 거기 파란 하늘이 출렁이고 있었다 보란 듯이 뒷산 미륵의 현신일까 거기 송장헤엄치개가 누워서 헤엄을 치는 중이었다 송이고랭이 여뀌 골풀이 군락을 이루어 주변을 호위하고 우리가 한여름 꿈꾸다 버린 헝클어진 구름들이 호수 가득 순례자 대열을 이루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비행운은 에펠탑 거느리고 발아래로 파고들고 여기가 정상인가 일행 중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호수 속 어디에선가 한 줄기 바람이 솟아올랐다 비로소 태양이 붉은 혀를 거두어들였다 그렇게 9월이 재림하고 있었다 2013. 8. 12.
뻐꾸기 뻐꾸기 김태일 저녁엔 올레길을 걸었다 한천 냇물 따라 굽이쳐 흐르는 뻐꾸기 울음에 나는 가던 길 멈춰 서서 귀 기울였다 울음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방송에서도 한 소녀가 흐느꼈다 유창한 불어 물결이 화면 가득히 넘쳐 흘렀다 꼭꼭 싼 무릎 위 배냇저고리에는 한글 성명과 생년월일이 단잠에 빠져 있고 아마 그녀일 게다 도저히 새끼 키울 둥지를 지을 수 없어 깊은 밤 동사무소 앞에 남몰래 탁란한 뻐꾸기 뻐꾸기가 운다 팽나무 가지 위에서 어느 옥탑방 처마 밑에서 멀리 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 바라보며 뻐꾸기가 운다 그녀가 운다 2013. 6. 23.
바람 바람 김태일 그때였다니까 시청 네거리 가로질러 냅다, 진지를 향하여 활강하는 쌕쌕이같이 날아들더군 무단횡단이었어 깔딱고개 자동차 물결 앞지르고 빨강 신호등도 무시하고 모르겠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마치 해일이었어, 느닷없이 태평양 횡단하는 새파란 돛이 둥실 솟아오르기도 하고 시베리아 기단 잠자던 독수리가 다시 덮쳐 오기도 하고 아무렴, 바람일 리야 있나, 그대라면 또 모를까 라일락 꽃향기 분분한 봄날이었거든 시詩가 흩날릴 듯한 2013. 5. 27.
섬 김태일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유랑하던 작은곰자리 별 무리의 활시위 소리가 하르르 섬의 발등을 적시기 시작하는 몽환적인 봄밤이었다. 관광용 서치라이트가 질주하는 용두암의 검푸른 바다 위에는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끌리듯 바닷가에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 조심조심 저 바다를 건너오던 한 아비의 노 젓는 소리가 다시 들려와서인지도 모른다. 바다 멀리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오는 사내의 초췌한 모습이 점점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유리구슬 구르듯 미끄러져 오던 물결이 어떤 사명이라도 완수하듯 사내를 슬쩍 바닷가로 밀어 올리곤 슬그머니 뒷걸음질쳐 멀어진다. 언덕 위에 오른 사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이상하다. 이곳은 하늘 위도 바다 밑도 온통 별나라다. 마치 동굴 속.. 2013. 5. 24.
별도봉 무지개 별도봉 무지개 김태일 누구의 몸짓일까요 남실바람 살랑이는 별도봉 자락 살물결 위 소맷자락 두둥실 떠오르네요 머리엔 낯선 햇살 허리엔 꽃구름 빗살 치맛자락 사르르르 애기 업은 돌 휘돌아 벼랑 끝 어디 휘파람새 소리 그가 왔나요 그녀가 춤을 추어요 긴 속눈썹엔 일곱 빛깔 눈물 2013. 2. 4.
낙타와 바다 낙타와 바다 김태일 외딴 바닷가에 엉거주춤 멈춰선 낙타 수평선 응시하며 눈을 껌벅인다 웬일일까 언제나 울퉁불퉁 투덜거리기만 하던 사막 오늘따라 몸 뒤척이며 허리를 편다 출렁이는 모래 언덕 넘실거리는 금빛 노을 오아시스일까 신기루일까 지난밤 그 별들이 쏟아져 내렸을까 순간 낙타의 두 눈이 반짝인다 낙타가 바다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파도가 낙타를 향하여 밀려온다 그대 처음 만날 때도 이랬지 모래무지 귓가로 속살거리는 금물결 텅 빈 눈동자엔 하얗게 샘솟는 오아시스 2013. 2. 4.
곶자왈 곶자왈 김태일 무심코 오일장을 지나가는데 '더덕 상 가, 더덕. 하영 주주, 하영' 할머니 목소리가 내 눈길을 붙잡는다 할머니 눈 속 바코드가 반짝인다 곶자왈이다 부엽토 한 줌 찾아 허리 굽힌 다근재기낭 까마귀 걸음으로 할머니 손등에서 종종거리고 햇살 한 입 찾아 엉거주춤 멈춰 선 개뽕낭 까무룩 주름진 할머니 콧등에서 자지러지고 그곳엔 흙도 하늘에서 내리더라 빛도 여우비처럼 감질나더라 발밑 그 어디 생명수 넘쳐흐르고 오일장 네거리 막무가내 둥지 튼 할머니 그 눈길이 촉촉하다 곶자왈이다 2013. 2. 4.
번개 번개 김태일 누군가 창밖에서 기웃거린다 어느 쇠락한 왕조 황야를 유랑하는 말발굽 소리 서천강 붉은 노을 사이 번득이는 그대 눈동자 느닷없이 날아드네 너와 나의 전생 무너져 내리네 이 한 생 와락 2013. 2. 4.
괜한 걱정 괜한 걱정 ​ 김태일 ​ 오늘은 며칠 전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가 온종일 왔다 갔다 하는 뜨락을 바라보다가 문득 별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다 해보았던 것이었는데 매일 아침 뻐꾸기 시계 소리 울리듯 창밖 나뭇가지에 날아들어 지저귀던 새들이 요즘은 한 마리도 보이지를 않아 혹 고 녀석들이 배가 고파 굶어 죽지나 않았을까,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씨잘데기 없는 걱정이댔다 고 가냘픈 발바닥으로 가지를 꼭 움켜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눈망울 하며 맛있는 열매가 있다며 가족이며 동료를 부르며 꼬리 쫑긋거리며 날개 퍼덕이며 조잘조잘 잘도 지저귀어대던 녀석들, 박새며 동박새며 참새며 직박구리며 까막까치며 그 외 이름 모를 새들의 수다가 뚝 끊기자 어쩐지 갯가에 버려진 폐선처럼 마음이 적막해져 안절.. 2013. 2. 4.
우수리강 그 들꽃 우수리 강 그 들꽃 김태일 무슨 까닭일까 흐느적흐느적 흐르는 희누런 강줄기 오늘따라 비가 내린다 눈보라에 쫓겨 옆구리가 터진 자작나무 가지에도 지평선 끝 주춤거리는 시베리아 횡단철마에도 언제였을까 여기 말달리던 옛 선인 가쁜 숨 몰아쉬며 목 축일 때 싱긋 미소 짓던 이름 모를 이 들꽃 가슴이 젖어드는지 지그시 눈 감고 손을 내민다 어서 오라고 - 제주문학 제53집(2010년 하반기) 발표작 - 2013. 2. 4.
바람의 올레 바람의 올레 김태일 그랬다. 제주는 바람의 올레였다. 나는 봄꽃의 유혹을 따라 오름에 오르다 문득 오름 올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흠칫 몸을 사린다. 고려 말 만주벌판을 단숨에 뛰어넘은 칭기즈칸의 말발굽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서우봉을 뒤덮는다. 불화살에 활활 새별오름이 타오른다. 태평양전쟁 말기 거문오름 분화구를 가득 메운 일본군들의 군가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쿵쿵 군화 소리가 메아리친다. 언제였던가. 깊은 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당오름 올레 초가삼간,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올라앉아 깔깔대며 분탕질하던 불바람. 그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할머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덩달아 미쳐 날뛰는 송아지랑 강아지랑 같이 뒤엉켜 덩기덩덩 춤을 추던… 둥, 둥,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 순간 진달래꽃 흐드러.. 2011. 5. 21.
가파도 호박꽃 가파도 호박꽃 김태일 좁다란 올레 나지막한 돌담길 얼기설기 뒤엉킨 호박 덩굴 위로 호박꽃 발돋움 아등바등 그 눈길 따라 무심코 고개 들었더니 엎치락뒤치락 나뒹구는 파도 너머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주렁주렁 바리바리 청보리 개구리참외 뿔소라 보따리 가득 자손들 먹을거리 울러 매 배 기다리는 할머니 얼굴에도 갈기갈기 갈라진 샛노란 호박꽃 2011. 5. 20.
천지연폭포 바위 얼굴 천지연폭포 바위 얼굴 김태일 차마 난 연못 속으로 뛰어내리는 그녀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요 너무 눈이 부셔 가슴 두근거려 하여 이렇게 엉거주춤 연못가에 몸 숨겨 뒤돌아 누워 반쪽 얼굴로 흘금거려요 저 하늘 흰 구름이 잠시 깃든 척 검둥오리 흰 뺨인 척 * 제주문학 제53집 발표작 천지연폭포 바위 얼굴 2010. 11. 13.
소나무 잎새에 나부끼는 파도소리 소나무 잎새에 나부끼는 파도소리 김태일 사라봉 길섶 소나무 잎새들이 지나가는 돌풍에 몸서리치듯 텅 빈 가슴 파고들어 쏴아 울음보를 터트립니다. 순간 당신의 초췌한 환영이 섬광처럼 등줄기를 훑어 파고듭니다. 개처럼 일경에게 끌려가던 당신의 다 낡은 바지저고리가 마지막 깃발이 되어 펄럭이던 만세동산, 그 바닷가 청지머루 보리밭 위를 날아가던 바람 까마귀떼 소리가 바로 쏴아 그랬습니다. 당신이 가미가제특공대 영웅이 되어 일장기 두르고 외눈 달아 외발로 돌아오던 날, 그 보리밭 잎새들은 훈장처럼 눈서리 주렁주렁 달고 벌벌 떨며 숨죽여 지나가는 미풍에도 쏴아 흐느꼈습니다. 우리가 왜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이유도 모른 체 미군정에 쫓겨 한라산 기슭 어느 동굴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그 땅속 심연에서 들려오던 바.. 2009. 8. 15.
시심詩心 시심詩心 김태일 느닷없이 내 마음 생의 옷을 벗고 구름처럼 흘러가는 어느 하늘가 휘몰아치는 태풍에 밀려오는 해일과 같이 으르렁거리며 쏜살같이 덮쳐오는 표범과 같이 단잠에 빠진 바다가 코를 고는 어느 봄 소나기 같이 느닷없이 신이 내리듯 2009.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