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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제주바다 숨비소리

by 숨비 소리 2013. 5. 24.

 

 

  섬

 

 

   김태일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유랑하던 작은곰자리 별 무리의 활시위 소리가 하르르 섬의 발등을 적시기 시작하는 몽환적인 봄밤이었다. 관광용 서치라이트가 질주하는 용두암의 검푸른 바다 위에는 뽀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끌리듯 바닷가에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언젠가 조심조심 저 바다를 건너오던 한 아비의 노 젓는 소리가 다시 들려와서인지도 모른다.

 

   바다 멀리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오는 사내의 초췌한 모습이 점점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유리구슬 구르듯 미끄러져 오던 물결이 어떤 사명이라도 완수하듯 사내를 슬쩍 바닷가로 밀어 올리곤 슬그머니 뒷걸음질쳐 멀어진다.

 

   언덕 위에 오른 사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이상하다. 이곳은 하늘 위도 바다 밑도 온통 별나라다. 마치 동굴 속이요 철옹성이다.

   에두른 수평선 너머는 이미 전생이고.

 

   한 아비가 있었다.

   몇 천 년 전부터 알타이산에서 만주벌판에서 한반도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사내는 이 나라에서도 저 나라에서도 그 나라에서도 늘 쫓기고 있었다. 날마다 사막에서 초원에서 골짜기에서 잠시 몸 기댈 곳을 찾아 바람처럼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사내의 가슴 속에는 수많은 나라의 이름이 하늘의 별처럼 들판의 꽃처럼 피고 또 졌다.

 

   그들을 품은 곳이 섬이었다.

   그들이 비로소 멈추어 선 곳, 그곳이 바로 섬이었다.

 

   여기 한 아비가 바닷가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비의 동공 속으로 알타이산 자락의 한 무더기 말발굽 소리가 큰곰자리 별 무리를 싣고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봄밤이 깊어 간다.

 

 

 

   * 제주문학 제58집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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