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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제주바다 숨비소리

바람의 올레

by 숨비 소리 2011. 5. 21.

 


 

 바람의 올레


  김태일


  그랬다.
  제주는 바람의 올레였다.

  나는 봄꽃의 유혹을 따라 오름에 오르다
  문득 오름 올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흠칫 몸을 사린다. 

  고려 말 만주벌판을 단숨에 뛰어넘은 칭기즈칸의 말발굽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서우봉을 뒤덮는다. 불화살에 활활 새별오름이 타오른다. 태평양전쟁 말기 거문오름 분화구를 가득 메운 일본군들의 군가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쿵쿵 군화 소리가 메아리친다.

  언제였던가. 깊은 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당오름 올레 초가삼간,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올라앉아 깔깔대며 분탕질하던 불바람. 그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할머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덩달아 미쳐 날뛰는 송아지랑 강아지랑 같이 뒤엉켜 덩기덩덩 춤을 추던

  둥, 둥,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
  순간 진달래꽃 흐드러진 한라산 올레마다
  숨죽여 번득이던 그 눈빛
  죽음보다 더 깊은 고요
  드디어 저승처럼 온 하늘 뒤덮는 새카만 까마귀떼
  하늘을 가르던 날갯짓 소리
  숨통마저 턱 멎던 그 바람 소리

  그랬다.
  제주는 불바람의 올레였다.

  나는 섬칫 사냥꾼에 놀란 사슴처럼
  서둘러 전설 속 거슨새미오름을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 제주문학 제54집(2011. 제주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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