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올레
김태일
그랬다.
제주는 바람의 올레였다.
나는 봄꽃의 유혹을 따라 오름에 오르다
문득 오름 올레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흠칫 몸을 사린다.
고려 말 만주벌판을 단숨에 뛰어넘은 칭기즈칸의 말발굽에서 피어오른 먹구름이 서우봉을 뒤덮는다. 불화살에 활활 새별오름이 타오른다. 태평양전쟁 말기 거문오름 분화구를 가득 메운 일본군들의 군가 소리가 들려온다. 저기 쿵쿵 군화 소리가 메아리친다.
언제였던가. 깊은 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당오름 올레 초가삼간,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올라앉아 깔깔대며 분탕질하던 불바람. 그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할머니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덩달아 미쳐 날뛰는 송아지랑 강아지랑 같이 뒤엉켜 덩기덩덩 춤을 추던…
둥, 둥,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
순간 진달래꽃 흐드러진 한라산 올레마다
숨죽여 번득이던 그 눈빛
죽음보다 더 깊은 고요
드디어 저승처럼 온 하늘 뒤덮는 새카만 까마귀떼
하늘을 가르던 날갯짓 소리
숨통마저 턱 멎던 그 바람 소리
그랬다.
제주는 불바람의 올레였다.
나는 섬칫 사냥꾼에 놀란 사슴처럼
서둘러 전설 속 거슨새미오름을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 제주문학 제54집(2011. 제주문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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