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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린 - 김태일 그대 아린 김태일 그대 아린, 나의 님이여 등굣길 언덕 너머에 피어난 무지개를 좇아 끝없이 들길 헤매던 그때도 그랬지 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는 아린 항상 미소나 슬픔으로 위장하여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그대 아린 제주 숨비소리 피 흐르는 이 몸속에 숨어 가야 고분 왕관 속 살로 빚은 역사이거나 알타이 산 몰락한 왕조 뼈로 지은 신화이거나 알 듯 모를 듯 은밀한 밀어 계속 속살거리는 그대 아린, 나의 님이여 그대가 이 가슴 속 여기 있어도 나는 오늘도 그대 찾아 길을 떠난다 한 걸음 다가가면 더 멀리 멀어지기만 하는 아린, 그대 아린, 나의 님이여 2023. 1. 11.
정방폭포正房瀑布 - 김태일 정방폭포正房瀑布 김태일 주저 없이 결단하기로 한다 흘러간 모든 추억 다 잊기로 한다 물론 뒤돌아 보고 싶기도 하다 지난 밤 차가운 이마 매만져주던 별빛이거나 그 올레 숲속 참꽃 향기이거나 실개천에서 옷깃 스친 바람이거나 하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지난하게 흘러온 삶의 여정 어쩌면 번개처럼 지나가 버린 생이다 불로장생 불로초의 유혹이거나 이 가슴 속 헤아릴 수 없는 미련과 욕망 팥죽처럼 펄펄 들끓고 있지만 그 어떤 사랑도 미움도 뿌리치기로 한다 저기 바다가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아픔 모두 포근히 감싸 안아줄 바다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있지 않은가 과감하게 결단한다 한라산 동백꽃 지듯 뛰어내린다 2023. 1. 11.
단풍 열차​​ - 김태일 / 제주문학 2022 가을호 ​ ​ 단풍 열차 ​ ​ 김태일 ​ ​ 우선 카페리를 타겠네 시월 어느 날 시베리아 횡단 철도 종단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여도 좋네 ​ 어쩌다 단풍 든 그대 옷자락이 뱃전에 부딪혀오는 파도와 몸을 섞어 풍악 설악 흩날리기라도 하면 좋겠네 ​ 동해 바다 어딘가에는 약속처럼 갈매기 날고 마침내 기차가 와 닿겠네 ​ 바람처럼 질주하는 열차를 타겠네 활활 불꽃이 되겠네 낙화 되겠네 ​ 그대가 앉을 자리에는 벚꽃 산수유꽃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엽서 한 장 넣어 두겠네 비워 두겠네 2022. 10. 24.
사람 발자국 화석 - 김태일 ​ 사람 발자국 화석 ​ ​ 김태일 ​ ​ 그러셨군요 하늘로 떠나버린 사랑하는 산방덕 찾아 기어이 바다로 뛰어드셨군요 마지막 발자국 화석 사계 바닷가 뜨거운 용암 위에 남기고 그렇게 그녀 찾아 떠나셨군요 애타는 송악산, 바다로 치닫고 목이 메인 산방산, 바다에 얼굴 파묻고 한라산도 발 동동 구르며 하얀 소복 갈아입어 눈물짓고요 2022. 10. 24.
천제연天帝淵 그 소녀 - 김태일 ​ 천제연天帝淵 그 소녀 ​ ​ 김태일 ​ ​ 천제연폭포에는 그녀가 산다 에메랄드빛 소녀 수학여행 때 내 도시락 싯어주던 단발머리 소녀 ​ 어느 여름이던가 달리는 시내버스 차창 밖을 소나기 맞으며 홀로 걸어가던 그녀 ​ 가을이 깊어지면 새파란 하늘에서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녀 ​ 천제연에는 그 소녀가 산다 에메랄드빛 투명한 선녀 ​ 2022. 10. 24.
사랑 - 김태일 / 2022 제주문학 여름호 ​​ 사랑 ​​ 김태일 ​​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말을 가볍게 입에 담지 마라 ​ 참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자신을 오롯이 내어주는 마음 무덤 속도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 사랑 한번으로 수벌은 기꺼이 주검에 들고 연어는 자기 몸까지 새끼 먹이로 내준다 ​ 사랑을 입으로만 설하지 마라 사랑은 죽음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다 ​ 2022. 5. 21.
은행의 시위 - 김태일 ​ ​ 은행의 시위 ​ 김태일 ​ ​대학로 은행나무 기세당당 개선장군이다 힘차게 뽑아 올린 외줄기 구호에는 지난봄의 설레임 한여름 끓어오르던 열정 은행들이 가지마다 자랑처럼 만선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지나가는 회오리 돌풍에 활활 타오르던 은행 단풍이 우수수 흩날린다 나부끼는 깃발 우람한 함성 드디어 은행 최루의 투석 난타전 다시 새카만 아스팔트 대학로엔 샛노란 스크럼 행진 밀고 밀리는 시위 물결 2022. 4. 20.
제주바다 숨비소리 - 김태일 제주바다 숨비소리 ​ ​ 김태일 ​ ​ 누나가 꽃신을 신으셨네 이제 비로소 꽃신을 신으셨네 ​ 평생 아들딸 먹여 살리려 볼래낭 할망당 방사탑에 두손 모아 제주 바당 열 길 물속 숨비소리 드높더니 예 보란듯이 꽃신을 신으셨네 ​ 평소 꿈도 못 꾸던 물항라 비단 치마저고리에 새 하늘 노을인 듯 저승 꽃신을 날아갈 듯 신으셨네 ​ 누나가 꽃신을 신으셨네 하늘에 오르려 꽃신을 신으셨네 ​ 2022. 4. 12.
탄생 - 김태일 탄생 김태일 느닷없는 피아노 소리에 화들짝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탄생하더라 시간을 거슬러 오른 귀머거리 베토벤이 운명을 거느리고 어슬렁거리는 막다른 골목 담장 위더라 동박새 한 마리 가쁜 숨 몰아쉬며 교향곡 속으로 날아 들더라 순간 따스한 입춘 햇살에 동백꽃이 열리더니 비로소 새로운 시공간이 탄생하더라 그때 환영 속 어느 산골 초가 토방에서 고고성 울리며 내가 탄생하고 있더라 나의 탄생이 곧 시간의 탄생이요 공간의 탄생이더라 내가 바로 이 세상이더라 2022. 4. 12.
선그라스 - 김태일 선그라스 김태일 선그라스를 잃었다 과감하게 새로운 색깔로 바꾸었다 세상이 달라졌다 신기하여 물구나무를 서보았다 하늘과 땅이 바뀌었다 하여 마음을 바꿨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2022. 4. 12.
별 꽃 - 김태일 별 꽃 김태일 밤하늘에는 더 밝은 별이 있다 어둠 짙은 곳이다 내 생에도 큰 별이 뜬다 고통 끝이다 들꽃 중에는 더 탐스러운 꽃이 있다 햇살 좋은 곳이다 ​내 마음에도 별 꽃이 핀다 아픈 사랑 끝이다 2022. 2. 9.
바당도 뒈싸지멍 갈라지멍 울었주 - 김태일 바당도 뒈싸지멍 갈라지멍 울었주 김태일 어멍도 아방도 오라방도 다 죽어부렀주 초가집덜도 ᄆᆞᆫ딱 불타부렀주 옷이고 이불이고 온갖 세간살이도 타부렀주 옆집 비바리도 우리 집 똥개도 미청 천장 만장 길길이 날뛰었주 살아이신 건 ᄆᆞᆫ딱 쓸어불젠 허여신ᄀᆞ라 마을이란 마을은 닥치는냥 불질러부렀주 죽은 괴기만 먹는 까마귀 떼덜만 온 섬을 뒤덮었주 칼바람 불어닥친 무자년 중산간 마을이었주 제주 바당도 뒈싸지멍 갈라지멍 울었주 2022. 2. 9.
선물 / 김태일 선물 김태일 너는 나에게 선물이다 그리움 걸어 놓고 눈 질끈 감은 수평선도 칼바람 한 모금 베어 문 사라 솔숲 파도 소리도 날밤 미리내 바래 날갯짓하는 한라 옷자락도 항상 겨운 너의 눈동자도 온 세상은 나에게 모두 순간순간 눈물로 빚은 선물이다 하지만 나는 창밖 저 길고양이에라도 눈시울 이슬 한 방울 달아 준 적 있을까 2021. 9. 20.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 김태일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김태일 오늘이 그 외삼촌 제삿날이주 누가 눈치챌세라 초가지붕 위 제사 음식 고수레도 못 하던 제삿날이주 4.3 무자년이었주 이유도 모른 채 쫓기던 외삼촌이 마루 밑에 땅굴을 파고 견디다 주위 시선이 두려워 산으로 오른 건 가을이었주 60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뒤란 대나무들도 모두 꽃을 피웠주 그 대나무를 잘라 죽창 만들었주 결국 팽나무에 목이 매달렸주 못다 핀 동백꽃이 들길에 흩뿌려진 와흘 산골이었주 마지막 숨을 거둘 즈음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고 전하여 오주 그 목에 밧줄을 걸어 질질 끌며 마을 마을 조리돌리다 관콧 바다 멀리 수장되었주 깊은 밤 이 누이가 몰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주 동백꽃 지듯 그렇게 외삼촌은 갔주 오늘은 외삼촌 제삿날이주 누가 볼세라 까마귀도 몰래 지내는.. 2021. 9. 20.
동심童心 / 김태일 동심童心 김태일 어릴 적 학교 가는 길 그 물웅덩이에서 꼬리치던 올챙이 오색 연화못에 잘 도착하였는지 그때 보리밭에서 날아오른 장끼 한 마리 금물결 언덕에 둥지 잘 틀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오늘 생일 맞은 아내 미소엔 지금도 소녀적 부끄러움 여울지는데 시냇가에서 들려오는 저 색소폰 소리 학창 시절 내가 분 소야곡인데 2021. 9. 20.
보리밭 탈곡기 소리 / 김태일 보리밭 탈곡기 소리 김태일 나만 살았주 모두 박성내에서 콩 볶듯 쏴버렸주 시신은 사태 끝나고 이빨이나 옷가지 모양으로 찾았주 자복이 무슨 뜻인지 몰랐주 거기 가면 무조건 살려준대서 마을 사람들에 떠밀려 얼떨결에 트럭에 올랐주 누군가 속삭였주 아무리 큰 잘못이 있어도 자수하면 살려준다는데 마지막 지푸라기일지도 모른댔주 순간 어리버리 온몸이 오싹했주 기회를 엿보다 트럭이 진드르에 접어들 즈음 어스름에 몸을 기대어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렸주 죽을힘을 다하여 달렸주 너무 숨이 차 보리밭 돌담 틈에 몸을 숨겼주 고장 난 탈곡기처럼 타닥타닥 위아래 이빨이 경련을 일으켜 마주쳤주 엉겁결에 보리를 한 무더기 뽑아 흙과 함께 이 입을 틀어막았주 주변 보리들이 작두날에 잘리듯 잘려 나갔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주 돌담 .. 2021. 9. 20.
소나기 - 김태일 소나기 김태일 오랜 가뭄 중 소나기 소리 요란하다 그런데 아무리 천둥 번개로 으름장을 놓거나 무지개 꽃단장으로 요란을 떨어도 소나기는 늘 크렘린 행 기차인 양 순식간에 우르르 떠나버리기 마련이다 역시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비는 온종일 쉬지 않고 내리는 보슬비다 수많은 밀어로 은밀하게 무장하여 이 가슴 담장 너머 나긋나긋 밀려온다 꽃잎이 열리듯 씨앗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듯 그대는 항상 소리 없이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언제나 소나기였다 보슬비인 적이 없었다 2021. 6. 20.
단풍 열차 - 김태일 단풍 열차 ​​ 김태일 ​ ​ 우선 카페리를 타겠네 시월 어느 날 시베리아 횡단 철도 종단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여도 좋네 ​ 어쩌다 단풍 든 그대 옷자락이 뱃전에 부딪혀오는 파도와 몸을 섞어 풍악 설악 흩날리기라도 하면 좋겠네 ​ 동해 바다 어딘가에는 약속처럼 갈매기 날고 마침내 기차가 와 닿겠네 ​ 바람처럼 질주하는 열차를 타겠네 활활 불꽃이 되겠네 낙화 되겠네 ​ 그대가 앉을 자리에는 벚꽃 산수유꽃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엽서 한 장 넣어 두겠네 비워 두겠네 2021. 6. 20.
탑섬 무렵 - 김태일 탑섬 무렵 김태일 나는 탑동 앞바다 어느 무렵 섬 하나 꿈꾼다 사라봉과 별도봉이 양 날개 퍼덕이며 오고 가고 오름 정상에 숨비소리 뾰족탑 기도하듯 솟아오른 뱃고동 되새김질하던 흑염소가 괜히 밀려오는 파도 들이받으며 씩씩거리고 한라산 봄바람이 털썩 주저앉아 목멘 문장 흔들며 그대 품에 안기는 신새벽부터 늦저녁까지 노을 궁전 경작하는 사라도령과 자청비가 부엉이 울음소리에 잠 깨는 나는 탑동 앞바다 어느 무렵 탑섬을 꿈꾼다 2017. 12. 3.
다시 유목의 시대 - 김태일 다시 유목의 시대 김태일 말들이 다시 지구촌을 내달린다. 유라시아 질주하던 유목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유목의 시대가 왔다. 말들이 달린다. 자판 위를 내닫는 말발굽 소리 요란하다. 말들이 달려 나가 문자가 되고 문장이 된다. 수많은 말 떼들이 말방울 소리 울리며 마을마다 고을마다 광속으로 질주한다. 말들이 날개 달아 전파를 타고 훌쩍 오대양 육대주로 날아오른다. 뜰 앞 휘파람새도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는가 싶더니 한 순간에 허드슨 강가까지 날아가 지저귄다. 천둥 번개 들고 국경 허물고 있는 인터넷 제단 앞에는 그동안 장벽 높이 쌓아올려 군림하던 신神들도 머리를 조아린다. 달에서 방아 찧던 토끼도 집으로 되돌아와 자판을 두들긴다. 파도가 하늘 위에서도 물결치고 구름이 장미꽃 속에서도 피어난다. 말들이 달린.. 2017. 11. 25.
적멸寂滅 - 김태일 적멸寂滅 김태일 여행은 적멸인가 구례 산수유 마을을 찾아가다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었다“산수유 마을 어디로 가요?”“좌회전이제이, 허벌나게 피었고마이.”차창 밖 시골 아낙이 아스라이 사라져간다 한밤에 출출하여 치킨 가게에 전화를 걸었다“여기 게스트하우스인데요, 치킨 두 마리요.”“지금 몇 신교? 잘못 걸었다 아이가.”전화기 속 아제도 찰칵 한순간에 영영 이별이다 우연히 올려다본 밤하늘 별똥별 하나왈칵 가슴을 후려친다 그래 그댈 잊기로 한다 이 생 또한 여행이 아닌가 2017. 11. 25.
보리암의 스트라이크 - 김태일 보리암의 스트라이크 김태일 남해 금산 정상에 오르니발아래 훨훨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뭇 섬들 바다 가득 유성이 쏟아져 내리더라가슴 속 온갖 시름 아스라이 녹아내리더라 천 년을 꼼짝없는 상사바위 주변에는한 무더기 구름 에돌아 맴돌고 파사석탑 인도 공주 해거름부터 비단 금침 펴더라 온 하늘과 바다가 황금 산하보리암도 오색 치마저고리 갖춰 입고 스트라이크 중이더라 2017. 11. 25.
찔레꽃 - 김태일 찔레꽃 김태일 종달새가 울자마자 쪼르르 물안개 뚫고 달려 나와 피었네 성산 일출봉 등경돌 머리에도소매물도 등대섬 병풍바위 허리에도 봄이 오면 곳곳 어디든 쫓아와서 피네 옛날에도 그랬네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조잘조잘연분홍 입술로 짭짜래한 해풍 풀어놓으며운동장을 가득 메웠네 가시마다 시치미 매달아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쏘아붙이는단발머리 새초롬이 저기 그 여학생도 있네 2017. 6. 18.
벚꽃 엿보기 - 김태일 벚꽃 엿보기 김태일 올 벚꽃은 좀 늦는다 싶더니 만개 후 십여 일이 지났는데도 그 몸짓 한번 화사하군요 그런데요 오늘은 지난밤의 수다를 마저 엿들으려다 그걸 보았다니까요 가지를 벗어던진 꽃잎들이 한동안 아스팔트 위를 몰려다니며 까르르 깔깔 호들갑을 떨더니잔디 위에 모여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지 뭐예요훨훨 흩날리는 꽃잎들은 바람난 노총각처럼 뭔가를 기웃거리고 있고요 호기심에 가만히 다가가 들여다보다가 그만흠칫 놀랐다니까요 아, 글쎄 요 앙증맞은 것들이 벌건 대낮에 벌써 집 나온 동백꽃과 살살살을 섞고 있더라니까요 2017. 6. 12.
개꿈 - 열려라, 참깨 / 김태일 개꿈 - 열려라, 참깨 김태일 진눈깨비 질척대는 광화문이었다. 해태상 옆 연자방아 위에서 새빨간 벼슬 꼿꼿이 세운 커다란 장닭이 갑자기 꼬끼오 울더니 두 날개 퍼덕이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는 태초 우주 탄생의 기억인 듯 온몸이 얼어붙어 수축하면서 한껏 아가리 벌려 기다리고 있는 어느 정유년으로 빠져들었다. 광장에는 어지럽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 오방낭에 목이 감긴 채 울긋불긋 휘청거리는 서낭당 옹기종기 피어나는 구름을 막무가내 무단 횡단하는 긴 비행운 나는 북악 동굴 입구에서 온돌방 아궁이에 참나무 가지를 집어넣으며 허겁지겁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동굴 속에서 집채 같은 황금 파도가 끓어오르면서 거대한 이무기가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마침내 어떤 깨달음에 이른 듯 광장을 가득 메운.. 2017. 3. 25.
북촌의 숨비소리 - 김태일 ​ ​북촌의 숨비소리 ​ ​김태일 ​ ​4.3 무자년 한겨울 북녘 바닷가 마을이었습니다. ​ 어디에선가 날아온 까마귀 떼 몇 마리가 불길하게 가슴 뻥 뚫린 멀구슬나무에 깃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우듬지에 매달린 멀구술 열매에서 신기 번득이는 말 떼들이 말갈기 휘날리며 달려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마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 무자년 동지섣달 어느 날이었습니다. 뿔 휘어진 숫소 몇 마리가 지나가는 사냥개 두어 마리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곧바로 마을에 폭풍이 휘몰아쳤습니다. 누렁이와 검둥이가 미친 듯 짖어대고 온 마을 초가지붕들이 불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 고함 소리, 신음 소리, 총소리. 사냥개 떼들의 싹쓸이 복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4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2016. 12. 24.
손님 - 김태일 손님 김태일 나는 손님이다 화창한 어느 봄날 소나기 뛰어들 듯 반쯤 열린 창틈으로 눈보라 휘몰아치듯 이 세상에 나는 손님이다 거울 속에도 연못 속에도 허락도 없이 뛰어든다 그대 또한 손님이다 창밖 새소리가 꿈속으로 날아들 듯 저 하늘 뭉게구름이 이 가슴 속으로 스미어들듯 아무 때나 불쑥불쑥 달 속에도 꽃 속에도 막무가내 떠오르는 그대 이 세상에 우리는 모두 손님이다 무례한 손님이다 2016.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