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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70

가을 엿보기 가을 엿보기 김태일 가을 질주하는 시계탑은 어둠 실은 막차 달리듯 덜컹덜컹 불나방 유혹하던 가로등은 공원 벤치 기웃거리며 그렁그렁 소슬바람 부는 빈 거리엔 애틋한 봄날의 약속 다 어디 가고 취객 술주정만 우렁우렁 밤하늘 반짝이던 순정? 열정? 추락하는 종교 따라 뉘엿뉘엿 우리 손가락 걸던 진초록 나라엔 낙엽만 전설처럼 뒤뚱뒤뚱 가로수 가지마다 높새바람 마지막 한 잎 털어내려 우왕좌왕 달콤한 매연에 빠진 아스팔트 단풍 옷 갈아입어 우쭐우쭐 2005. 11. 19 2009. 8. 16.
칼과 방패 칼과 방패 김태일 나는 사실 칼날이었지 얼음산 가지에 오종종 숨어 떨며 복수의 화신처럼 삐쭉빼쪽 싹마다 파란 날 숨겨 세상을 힐끔거렸지 그러던 어느 봄날 먹구름 사이 슬쩍 내비친 햇살의 미소에 그만 멈칫 넋 잃고 부처 손처럼 벙그러져 세상에 안겼지 한여름 태양이 온몸 타올라 콩 볶듯 콩닥이자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었지 이제 눈보라 맞서 씨앗 지키려 환생 약속 지키려 어미닭이 알 품듯 낙엽이 되어 방패 되려는 나 사실 나는 칼날이었지 2005. 11. 7 2009. 8. 16.
샘솟는 슬픔이 흐르는 슬픔에게 샘솟는 슬픔이 흐르는 슬픔에게 김태일 아들아, 올 가을비는 좀 거세었지? 바알갛게 물든 캠퍼스 벚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추억을 한 잎 두 잎 들춰내자 파란 하늘이 깨진 거울처럼 낙엽에 실려 흘러내리는구나 음, 그렇구나 강물만 흐르는 게 아니구나 구름도 흐르고 계절도 흐르고 너를 향한 사랑도 흘러내리는구나 하지만 뜰 앞 감나무에 낙엽이 지듯 질금거리며 흘러내리는 사랑은 이제 싫구나 흐르는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 슬픔, 솟아오르지 않는 그리움, 저기 떨어지는 낙엽이잖니? 아들아, 진정한 사랑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슬픔, 이 가을 목에 두르고 떠나가는 금빛 노을보다 새봄 부활의 불길 더 붉겠지? 2005. 11. 6 2009. 8. 16.
어머니, 여기 계셨군요 어머니, 여기 계셨군요 김태일 어머니 밤마다 정화수 떠 놓고 은하수 계곡마다 온 동네 별들 불러 모아 두 손 곱게 합장하여 이 자식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 이 밤도 제 몸 속 어느 호젓한 산자락 저 하늘 별빛으로 뒷동산 들꽃으로 이 가슴 사랑으로 몰래 숨어들어 기도하시는 어머니 그렇군요, 어머니 어머니는 여기 계셨군요 제 몸 안 피와 살과 뼈 속 이 마음 속 어머니가 바로 저로군요 어머니 2005. 10. 31 2009. 8. 16.
아린 아린 김태일 아린, 님은 천년 후 어느 오솔길에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소매 파고들 그리움 밤마다 달빛 알몸 뒤척일 시냇물 그 물결, 아린 그림자 2005. 10. 10 2009. 8. 16.
여보게 친구, 세상이란 한 떨기 詩 아닌가 여보게 친구, 세상은 한 떨기 시 아닌가 김태일 여보게 친구 오늘 새벽 창틈으로 그를 보았지 돌담길엔 서릿바람 우줅거리고 멀구슬나무 가지마다 까마귀떼 날아들더군 그래 친구, 이제 그만 떠나가게나 한여름 천둥 안아 뒹굴던 휘파람새 사랑은 저녁노을 타는 뭉게구름에 실쭉샐쭉 슬쩍 숨겨 떠나가라구 이보게 친구, 세상이란 한 떨기 시 아닌가? 어쩌다 내린 소나기에 피어나 두근거리다 감상문 한 편 곱게 쓰고 다시 물려드려야 할 향기 시린 한 송이 시 말이네 그래 친구, 들불처럼 타오르는 놀빛 열정은 복수초 몽우리 속 깊이 사무쳤다가 함박눈 살포시 열어 피어나게나 허허 친구, 그래 그래 또 보자구 2005. 10. 8 2009. 8. 16.
연꽃섬 연꽃섬 김태일 흑산도가 성불하려 서해바다 까맣게 태우며 깊은 가을 밤 별빛으로 빚어 피운 한 쌍의 연꽃 섬 홍도 풋 서방 그리다 저승으로 떠난 여인의 애절한 전설 깃대봉*에 펄럭이고 속세 그려 탑 쌓다 사랑하는 여인 잃은 어부의 눈물 슬픈여*에 잦는 섬 해 뜰 녘 잿빛 연못 바다 하늘에 안겨 활활 타오르면 속세 번뇌 훌훌 뜬 구름에 벗어 놓고 좌불상* 품어 해탈 꿈꾸는 한 쌍의 부부 섬 연꽃 섬 * 깃대봉, 슬픈여, 좌불상 : 홍도 전설이 깃든 바위, 암초, 동굴 2005. 10. 3 2009. 8. 16.
달 덜 찬 갈 별 노래 달 덜 찬 갈 별 노래              김태일갈꽃 핀 연화못 밤이슬에 취한 별들 불러 모아옆집 아낙네 너스레 풀듯 귀뚜라미들과의 오케스트라질주하던 아스팔트 길도 별들의 유혹에 가던 길 잃어 들판으로 시근벌떡별빛 싣느라 우걱지걱밤하늘에 넋 잃은 메밀꽃은달빛 깔고 드러누워 달 덜 찬 갈 낳으려 아근바근반딧불 껴안아 자질자질가만 귀 기울여 들어 봐요 한라산 허리에 쏟아져 내리는 뭇 별들의 사랑 노래풀벌레들과의 오케스트라2005. 9. 24 2009. 8. 16.
일출봉 일출봉 김태일 빛 불꽃 생명과 부활의 불길 막내가 태어나던 아침처럼 시나브로 탯줄을 타고 제주바다 수평선 위로 용솟음쳐 오르는 햇살 태양이 세상을 낳는다 가만히 숨죽인 태고적 고요와 적막을 걷어 성산 일출봉이 생명의 깃발 되어 펄럭이기 시작한다 바알갛게 일렁이며 하늘이 열린다 바다가 타오른다 제주신화가 새벽미사 종소리에 춤을 춘다 아흔아홉 봉우리마다 피어나는 생명꽃 향기에 오늘 또 다시 환생한 듯 한라산신과 설문대할망*이 색동 하늘저고리 휘날리며 덩실덩실 불춤을 춘다 금백조와 소로소천국*이 일만팔천 신들의 기도를 모아 성령으로 부활한 듯 살 오르고 피 흘러 비단 바다치마 펄럭이며 신나락 만나락* 불춤을 춘다 부활과 환생 품은 생명의 불길 핏빛 구름 타고 올라 구천하늘 내달린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제주바다 .. 2009. 8. 16.
누나 품에 안겨 우는 제주바다 - 김태일 누나 품에 안겨 우는 제주바다 김태일 제주바다는 하느님의 눈물인가요 함박눈 내리는 한바다에 바람이 불면 열두 길 물속 누나 품에 안기어 울고 고요한 바다에 달빛이 흐드러져 피면 누나 숨비소리* 그리워 울어요 제주바다는 한라산의 눈물인가요 누나 삶을 엮어 빚은 낮달도 기울고 누나 숨비소리* 잦아드는 저녁이 오면 백록담 흘러내린 노을 바다가 누나 어깨 부여안아 눈물 흘려요 제주바다 품에 안겨 우는 누나야 제주바다 품에 안아 우는 누나야 오라비 시에 취해 화답으로 저 세상 숨비소리* 훠어이 훠이 뿌리며 전화통에 눈물 펑펑 쏟는 누나야 제주바다는 누나가 쓴 시인가요 누나를 쓸어안은 제주바다는 높하늬바람 소리에 목이 메이고 학자금 찾아 자맥질하는 누나 눈에는 한라산 낮달이 잘름거려요 제주바다가 눈물 되어 출렁거려.. 2009. 8. 15.
제주휘파람새 숨비소리 제주휘파람새 숨비소리 김태일 호오, 로로로 뤼오 난 떠나기 싫어요 파도치는 억새 물결 속에 숨어 이방인의 목소리로 이별을 더듬지 말아요 지난 밤 마칼바람 소리에 소스라쳐 떠난다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 같이 노래하던 별도봉 기슭에 상록의 전설 만발하고 지난 봄 튼 둥지가 아직도 따뜻하잖아요 호오이, 이어 이어 이어도 이어 저 바다 건너면 환상의 나라 있나요 여기가 바로 이어도일 거예요 나는 이곳이 좋아요 혹 저 빌딩 숲 속 사탄이 춤을 추더라도 금단의 열매 함께 따먹고 종탑에 숨어 기도하다 눈보라 휘몰아치면 꽁꽁 얼어붙어 등신불이 될래요 우리 그냥 이대로 있어요 이제 곧 봄이잖아요 호오, 로로로 휘오 2005. 8. 17 2009. 8. 15.
구름에 애련 실어 - 제주문학 제50집 2009년 구름에 애련 실어 김태일 슬픈 사랑은 바람입니다 이제 한 여름 불타던 사랑의 아픔일랑 저 뭉게구름에 고이 걸어 두어요 벌써 텅 빈 가을이잖아요 삶이란 구름이에요 얼음 녹은 강가 휘파람새 소리에 봄바람이 일고 잠시 들불 같은 사랑이 휩쓸고 지나가면 타고 남은 강물에 바람도 없이 흐느껴 흐르는 구름 강물이 우리 삶 실어 낙엽 진 어느 산자락에 바람되어 누우면 흰 구름 애련 한 조각 함박눈으로 소복소복 쌓여요 2005. 8. 16 2009. 8. 15.
서천꽃밭 불야성 - 제주도 시ㆍ사진 화보집 '가슴에 담을수록 아름다운 제주' 발표작 서천꽃밭 불야성 / 김태일 한여름 깊은 밤 연화못 돌담 기어오르던 연꽃이 신산만산 별빛 담아내느라 가던 길 멈추고 도시가 내뿜는 불야성은 온 바다 가득 뜬 집어등과 더불어 자청비* 신화를 되새김질한다 플라톤이 그리던 이상향 제주인이 꿈꾸던 환상의 섬 '이어도'가 바로 이곳인 듯 니체가 죽었다고 고뇌하던 신 가시나무 등걸에 걸린 문도령* 주검이 환생한 듯 하늘 땅 아우른 제주바다 불야성이 신화 속 자지러지던 부엉이 울음소리 포근히 재우고 서천꽃밭, 천국의 문을 살짝 연다 탑동 바당 연인들의 눈길에는 활활 타오르는 '칼 선 다리' 건널 자청비*의 사랑이 소낙비로 내리고 짙은 마스카라 젖은 눈동자엔 눈물 한 방울 * 자청비와 문도령 : 제주신화 '자청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주인공 - 자청비가 환생꽃을 얻어.. 2009. 8. 15.
새벽 빗소리 새벽 빗소리 김태일 생명의 소리 내 영혼 두들기는 소리 새벽잠 깨우는 빗소리 대추가 익어가는 유년의 초가을 동네방네 울려퍼지던 어머니 다듬이질 소리 모두가 잠든 새벽 초가지붕 머리맡에 달아둔 닭장에서 어미닭이 계란 쪼는 소리 몇 천 년 구천하늘 구름 속에 숨죽여 기다리다 이 여름 신록을 피아노 건반인양 두방망이질 해대며 삶을 재촉하는 새벽 빗소리 하얀 백지 위를 달리는 펜 소리 배고픈 영혼의 소리 생명의 소리 * 환생꽃 : 제주 신화, 서천꽃밭 '꽃감관'에 등장하는 꽃의 한 종류로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꽃 2005. 8. 7 새벽 * 아래는 詩作 과정입니다. 제주에는 오늘 새벽부터, 올 해 들어 비다운 비가 처음으로 신이 나게도 대지를 두드려 대는군요. 어느 피아니스트가 이렇게 통쾌하게 대지의 건반.. 2009. 8. 15.
섬의 독백 섬의 독백 / 김태일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아침마다 수평선 열어 치솟아 오르는 태양과의 열애, 철따라 바꾸어 입는 구름의 치장만으로도 차라리 나는 숨이 막힙니다. 다만 한 여름 활활 타오르는 우리 사랑을 시기한 강림차사가 새까만 까마귀떼 덮치듯 태풍을 휘몰아 와선, 4만년을 씻고 빨아도 결코 희어지지 않을 제주바다 검은 갯바위를 껴안아 뒹굴기 시작하면 사라봉 등댓불이 아무리 목이 타도록 불을 밝혀도 찾을 길 없는 생명의 불덩어리, 태양이 그리울 뿐입니다. 폭풍우에 울부짖는 백록담은 활활 타오르는 태양과의 입맞춤이 그리워 밤새운 나의 눈물, 그 슬픔의 깊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태풍의 시기는 순간일 뿐, 또 다시 나의 뜰에 신산만산 별이 내리고 먹구름 사이로 따스한 햇살 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계절.. 2009. 8. 15.
뻐꾸기 둥지에 내리는 실빗소리 뻐꾸기 둥지에 내리는 실비 소리 / 김태일 뜰 앞 포도나무 잎 위에 실비 소리 아른아른 속삭입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올챙이들이 알에서 깨어날 즈음 개구쟁이들에게 하늘에 뜬 구름을 담아주던 어느 호젓한 오솔길 연못이 거미줄 가까이 날갯짓하는 호랑나비에게 속살거리던 소리가 그랬지요. 청소년 시절 조심조심 다가간 해수욕장에서 훔쳐 본 미끈하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백마처럼 밀어닥친 파도가 금세 밀려나갈 때 바다를 향해 야드르르 애원하던 소리도 바로 이 소리였습니다.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시커먼 아스팔트 위를 종횡무진 무단 횡단하며 나뒹굴던 그 가을의 낙엽 구르는 소리가 그랬지요. 그 언제인가,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어느 겨울 저녁, 어머니가 옛이야기 들려주며 내 까까.. 2009.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