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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70

새소리 흉내 내기 새소리 흉내 내기 김태일 어스름 기웃대는 감나무 가지 가을 품어 날아든 새 한 마리 지저귄다 누런 감잎에 감사기도 올리는 듯 감빛 깃털 추스르며 감질나는 몸짓 지난 초여름 어느 오르막길 달리던 차창으로 날아든 그 새끼 새일까 아스팔트 길 나뒹굴다 되똑되똑 길섶으로 숨어들던 그 새 무심코 밟은 가속 페달 날아드는 새들의 생명 앗아가듯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 있을지도 몰라 가슴 두근두근 귀를 모은다 저녁노을에 몸 기대어 새들이 속삭인다 내 눈길도 저 새의 날갯짓 같이 감나무 가슴 적시고 있을까 가만히 입 모아 새소리를 흉내 낸다 2006. 9. 2 2009. 9. 1.
성황당 도둑고양이 성황당 도둑고양이 김태일 잠자리 한가로이 맴도는 마당 꼬마는 무서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은 항상 도둑고양이 차지였다 앙칼진 울음소리 허연 이빨 활활 타는 눈 병아리 채 가는 독수리처럼 바람 같이 뛰어들기라도 하면 등줄기엔 파도가 집채 같은 파도가 쏴아 밀려왔다 밀려나가곤 했다 돌담길 채송화 자글자글 타던 어느 날 보리죽 훔쳐 먹다 들킨 형이 그랬다 번득이는 눈길 내달리는 발길 초가지붕 위로 하얗게 덮쳐오는 파도 온 하늘과 산과 들 뒤흔들었다 헐레벌떡 숨어든 성황당 보리수나무 먹구름 사이 햇살 한 모금 물고 긴 머리 풀어헤쳐 헤헤벌쭉 반짝였다 한라산 천둥소리 어미 소처럼 울고 2006. 8. 24 2009. 9. 1.
오솔길 숨비소리 오솔길 숨비소리 김태일 바로 그때였지 어스름 내뿜으며 나의 유년 속으로 유영하여 온 뱀 내 발등 물었지 나는 반딧불 반짝이는 호박꽃 손에 꼭 쥐고 엄마 등에 업혀 들길 달렸지 오솔길엔 온통 들국화 그 사향 빛 그 노란 향 노을 진 하늘엔 노란 반딧불이 폭죽처럼 날렸지 별이 된 호박꽃 지천으로 흐드러지고 하지만 어둠은 몰래 숨어드는지 독이 점점 퍼져 온몸은 활활 불덩어리 엄마의 땀과 눈물,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고동 오솔길 가득 엄마 숨비소리* 그때 비로소 난 알았지 빛이 곧 어둠이요 어둠이 곧 빛이라는 것을 * 숨비소리 : 제주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바다 깊이 잠수 하였다가 바닷물 위로 올라오자마자 꾹 참았던 숨을 급히 내쉴 때, 자연스럽게 내는 휘파람 소리 비슷한 소리 2006. 8. 16 2009. 9. 1.
돌탑의 꿈 돌탑의 꿈 김태일 누가 쌓아 올렸는가 바닷가에 구멍 숭숭 뚫린 돌탑 하나 실파람 살바람 들며 나며 하루 종일 웅웅거린다 하늘엔 벌써 새털구름 날고 수평선 너머 하늬바람 휘돌아 드는데 무슨 바램 그리 많은지 지나가는 파도 모두 불러 하소연 오늘도 바다 위로 솟아오른다 새끼 태풍이라도 슬쩍 불러 한 무더기 꿈 싣고 날아오르려는지 동네 친구들까지 모아 놓고 누가 쌓아 올린 돌탑일까 바닷가 외딴 널바위에 솟아올라 한밤 파도 소리에도 젖고 지나가는 별똥별에도 웅웅거린다 2006. 8. 5 2009. 9. 1.
우도 바다 강물 소리 ​​ 우도 바다 강물 소리 ​​ 김태일 ​ 성산포 해안도로 지미봉 자락 암대극 꽃피워 바람 타는 날 차마 못 잊어 사뭇 사무쳐 우성강*을 건너요 애증의 강 ​ 우도봉 올라선 눈을 감아요 일출봉 봉우리마다 그리움 나부끼고 한라산 뭉게구름 제주바다 안아 흐느낄 적 너울너울 강물 소리 흘깃할깃 뒤돌아보는 거친 숨소리 ​ 차라리 잊어요 귀도 막아요 저 서러운 금빛 노을 소리 바다도 그리우면 강물 되어 흘러요 이 가슴 속 강물처럼 ​ ​ ​ * 우성강 : 제주특별자치도 우도와 성산읍 사이를 강물처럼 급히 흐르는 바다를 일컬음 ​ ​ 2006. 7. 31 ​ ​ 우도 바다 강물 소리 ​ ​ 김태일 ​ ​ 성산포 해안도로 지미봉 자락 암대극 꽃피워 바람 타는 날 차마 못 잊어 사뭇 사무쳐 우성강*을 건너요 애증의 강.. 2009. 9. 1.
파도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 제주문학 제50집 2009년 파도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김태일 꽃만 피는 것이 아니다 시냇물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이 마음 외딴 어느 바닷가 온 영혼 뒤흔드는 그대의 물결 바람만 부는 것이 아니다 파도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2006. 7. 31 2009. 9. 1.
저승에서 훔쳐 온 누나 숨비소리 - 다층 2008 가을호 저승에서 훔쳐 온 누나 숨비소리 김태일 호오오이~ 제주 바당 열두 길 물 속 솟아오른 누나 용궁 올레에서 부활한 듯 저승에서 훔쳐 온 긴 숨비소리* 호오이~ 저녁 노을 옥색 물치마 바라보며 호오이~ 새끼 잔뜩 품어 안은 한라산 올려다보며 호오오이~ 그래서 섬이 울었다 파도가 또 그렇게 울었다 누나 눈물은 저승 꽃 제주 바당은 누나의 눈물 이승 문턱 수평선 넘어오며 호오이~ 파란 하늘 천국 문 다시 올려다보며 호오오이~ 제주 바당 폭풍우, 집채 같은 파도 속 누나 숨비소리 호오오이~ * 숨비소리 : 제주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바다 깊이 잠수 하였다가 바닷물 위로 올라오자마자 꾹 참았던 숨을 급히 내쉴 때, 자연스럽게 내는 휘파람 소리 비슷한 소리 2006. 7. 8 2009. 9. 1.
한바다에 꽃피워 놓고 한바다에 꽃피워 놓고 김태일 살바람 언덕 그리워 전생 내리듯 이 한바다 가득 물안개 어느 여름 밤 한라산 존자암 두 손 모은 향불처럼 하소연하듯 속삭이듯 제주바다 소나기 물안개 피워 바다 끝까지 안개꽃 각시탈 실눈 흘기며 웃는 듯 우는 듯 이 가슴 혼불 지펴 놓고 2006. 7. 7 2009. 9. 1.
뒷동산 청노루처럼 뒷동산 청노루처럼 김태일 그대 창문을 열어요 어느 날 창틈으로 날아든 새끼 제비 서툰 날갯짓처럼 오늘 아침 뛰어든 뒷동산 청노루처럼 그대 가슴 속 날아들래요 이제 잊어요 지난 밤 휘황턴 네온불 거리 번들대던 아스팔트 그건 이방인들의 제로섬 게임 이제 창문을 열어요 뒷동산 뛰어든 청노루처럼 그대 빈 가슴 뛰어들래요 가만, 가만히 2006. 7. 7 * 오늘 아침, 제주대 안 동산에 청노루 한 마리가... ^^ 2009. 9. 1.
화엄사 천둥소리 화엄사 천둥소리 金泰一 화엄사 소나기 각황전* 서원 이룰 공주로 환생하여 지리산 골골 운무로 피어오르면 백두대간 뒤흔드는 지리산 천둥소리 섬진강을 거슬러 오른 화엄사 범종*소리 연기존자* 화엄경소리 석등 속 번개는 민란 전란 화염 속 먹구름 속 연못에서 연꽃 피운 핏빛 눈빛 벼락이 진다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버려라, 벗어라 산다는 건 비우는 것, 마음을 비워라 육신 벗은 영혼들의 각황전 풍경 소리 화엄사 천둥소리 * 각황전 : 노파가 공주로 환생, 서원하여 지음 * 화엄사 범종 : 임진왜란 때 일인들이 일본으로 반출하던 중 동해바다에 가라앉았다고 전해 옴 * 연기존자 : 삼국시대, 지리산 자락을 찾아 들어 화엄사의 첫 주춧돌을 놓았다는 인도 스님 2006. 6. 15 2009. 9. 1.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 - 제주문학 제46집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 金泰一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 이 영혼 부르는 소리 어느 아득한 옛날 지친 날개 접어 긴 넋두리 풀어 놓던 파도 아직 시커먼 너럭바위 자락 파닥거리고 갯바람이 하얀 햇살 몰고 보리밭마다 물결치는 곳 끌리듯 달려간 내 고향 그 바닷가 본향당 보리수나무 가지엔 치렁치렁 흘러간 세월 엉거주춤 멈춰 선 영혼 골목마다 튀어나오는 유년의 추억 어디선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술래의 발자욱 소리 등줄기 훑어 내리는 노란 현기증 순간, 나는 조심조심 방사탑에 올라 펄펄 끓는 파도에 흘러간 시간을 휘휘 저어 보리죽 마시듯 꿀꺽 삼킨다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 이 가슴 방망이질 소리 2005. 6. 12 2009. 9. 1.
섬진강에서 만나요 섬진강에서 만나요 金泰一 섬진강에서 만나요 송림 죽림 뿌리 설킨 모래톱마다 은빛 물살 눈 흘기며 몸살 앓는 곳 우리, 섬진강에서 만나요 소나기 켠 금빛 노을 불길에 싸여 지리산과 백암산이 만나 살 섞듯 선화공주와 서동이 만나 피 섞듯 둘이 서로 한 몸 되어 흘러 흘러서 저 화엄의 바다로 가요 섬진강에서 만나요 평사리 황금벌 서희 아씨가 진펄 속에서 길상이 만나 혼 섞듯 운명처럼 우리, 하동 섬진강에서 만나요 2005. 6. 12 2009. 9. 1.
내 가슴에 뜨는 달 내 가슴에 뜨는 달 김태일 별 같이 많은 날 뻐꾸기 둥지에서 살 비비며 살 때 그 땐 몰랐더니 떠나고 보니 그립구나 어느 달빛 밝은 밤 선녀 날개 달고 오똑 코에 커단 눈 반짝이며 살짝 미소 지어 살그머니 날아든 너 그래, 진경아 이 세상 존재하는 건 모두 빛이란다 지금도 네 눈 반짝이겠지? 네 잠시 떠난 후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 듯 사각사각 이 빈 가슴 가득 울려 퍼지는 달빛 내리는 소리 떠나야 아는가 보다 차마 몰랐더니 자석처럼 자꾸 네 방으로 가는 눈길 창문마다 너의 달빛 2005. 6. 2 2009. 9. 1.
슛, 골인 슛, 골인 김태일 저기 골문이 보인다 질풍노도처럼 천리마처럼 휘몰아쳐라 슛, 골인이다, 골인 우리는 동이족 유목민족 치우천황(蚩尤天皇)이 세계 호령하듯 붉은 악마처럼 도깨비 불꽃처럼 백두대간 알타이산 우랄산맥 건너뛰고 호랑이 같이 용감하게 오랑캐처럼 쳐들어가라 저기, 꿈의 블랙홀 천지개벽의 골문이 보인다 달려라, 달려 태극(太極)을 드리블하여 질풍 같이 내달려라 치우천황이 환생한 듯 번개 치듯 벼락 치듯 너와 나의 붉은 심장이 터져 하나가 될 때까지 슈웃, 골인이다, 골, 골, 골 팔천만이 한 몸 되어 대, 한, 민, 국 2005. 5. 31 2009. 9. 1.
바람이 피운 꽃 바람이 피운 꽃 김태일 바람이었다 나를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시커먼 암벽 높이 치솟아 오르다 하얗게 목이 메어 스러져 내리며 파도꽃 피운 건 바람이었다 이 한 밤 숨 죽여 두근거리다 이 가슴 속 솟구치는 파도소리 이 마음 뒤흔든 건 바람이었다 그대였다 2006. 5. 11 2009. 9. 1.
다랑쉬오름에서 날아오른 찔레꽃 - 제주문학 제44집 다랑쉬오름에서 날아오른 찔레꽃 김태일 나, 여기 있어요, 할머니 할머니 무덤 가 찔레꽃 속 바람의 궁전 고모가 심어놓은 둥굴레꽃 품 안 환생의 제단 할머니, 여기, 여기요 아뇨, 무섭긴요, 오월인데요, 뭘 저기, 형아 행글라이더에 올라타 구름 위도 날아오르고 종달새 타고 올라 이렇게 노래도 부르잖아요 그래, 훨훨 날아라 나의 작은 새 대나무 잎에 넋 들어 신나락만나락* 솟아올라 4.3* 불길 뛰어 넘어 서천꽃밭* 불꽃으로 타올라라 화염이 되어 화엄의 나라로 육체를 뛰어 넘어 영혼의 나라로 까마귀 등허리 찔레꽃으로 피어나 하늘하늘 날아올라라 내 무덤 가 둥굴레꽃, 평화의 종을 울려라 그래 그래, 나의 작은 새 귀여운 내 새끼 네, 그래요, 할머니 저도 벌써 환갑이 넘었는 걸요 걱정 마세요 옆집 누렁이도 뒷.. 2009. 9. 1.
릴케가 루 살로메 그리듯 릴케가 루 살로메 그리듯 김태일 봄바람 술렁이고 파도소리 앓아눕는 오월이면 난 문득 잊었다는 듯 바닷가로 액셀을 밟는다 기다렸다는 양 한달음에 달려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루 살로메 그리듯 섬을 파고들며 속삭이는 파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내 심장이 멈추어도 나의 피는 당신을 실어 흐를 것입니다.' 오늘도 봄비 내리고 시냇물이 온 섬 적시며 흘러 바다가 되고 바다는 다시 섬이 그리워 밀려오는데 난 지금 어느 빈 산기슭 홀로 적시는가 바닷가 언덕엔 아직도 운명의 굴레인 양 수평선 목에 두르고 바람의 볼 비비는 소나무 한 그루 너럭바위 자락마다 그대 아린 발자욱 소리 2006. 4. 27 2009. 9. 1.
얼음새꽃 얼음새꽃 김태일 북소리 둥둥 동토의 찬란한 반역인가 진군 나팔소리 한겨울 살얼음 속 생명의 불길 한라산 골골 부활의 불길 주검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새싹 바수어진 둥지에서 샘솟는 꽃잎 이 마음 속 외진 폐허의 신전 남 몰래 피어난 얼음새꽃 한 송이 홀로 자글자글 탄다 2006. 4. 17 2009. 9. 1.
벚꽃 교향곡 - 제주문학 제44집 벚꽃 교향곡 김태일 폭설 휘몰아치던 앙상한 가지 골고다 언덕 토담 움집 굳게 닫혔던 창마다 하늘을 바라 터져 나오는 기도 하얗게 벚꽃이 핀다 잔설 분분한 한라산 깊은 계곡 어느 순간 치떨리는 운명의 아리아 파도치듯 눈보라치듯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제1악장 '운명아, 비켜라. 내가 나간다' 부르튼 가지마다 샘솟는 그리움 숨이 막힐 듯 가슴이 터질 듯 뭉게뭉게 끓어오르는 하얀 목마름 아, 가슴이 탄다 2006. 3. 31 2009. 9. 1.
[서사시] 한라산 불춤 한라산 불춤 樹影 金泰一 1 이 한바다에 아승기겁(阿僧祇劫) 어느 기구한 여인이 쌓아 올린 젖무덤인가 온 섬 가득 한라산 외사랑이다 저 하늘 끝 은하수 품속으로 치솟아 오르려는가 백두대간 못 잊어 한이 샘솟아 쌓였는가 태평양이 그리워 바다로 내닫는가 산등성이마다 바닷가마다 밤낮 없이 구름이 하늘 가리고 바다가 길을 막아 새카맣게 숯덩이가 되어버린 현무암 봉우리 오늘도 가슴이 타는 한라산 2 한라산은 솔개로부터 생명 지키는 암탉이었다 양 날개 속에 병아리 가득 품고 주검의 강이 흘러갈 때마다 온몸 던져 깃털이란 깃털이 모두 핏빛 단풍 되어 흩날리더라도 숨통이 붙어 있는 한 품었다 사시사철 바람떼 비바람, 눈보라, 구름떼 집채 무너지듯 밀려오는 파도떼 바다 건너 몰려온 조조로 근 놈*덜 게다짝 끌고 해변으.. 2009. 9. 1.
헉, 가지마다 당신 입술 헉, 가지마다 당신 입술 김태일 '혜선아, 이것 좀 봐, 아침 햇살에 앵두나무 꽃을 피웠네.' 지난 가을 지는 낙엽 붙잡아 하소연하다 그리스 신전처럼 뼈만 남은 앙상한 가지 기도인 양 함박눈 쌓이더니 부활하여 눈이 부신 듯 두 손 모아 살포시 감은 눈엔 이슬 한 방울 '이런, 꽃이 꼭 당신 닮았네. 헉, 당신 입술 그렁그렁 열리겠는 걸' 2006. 3. 21 2009. 9. 1.
아이, 부끄러워 아이, 부끄러워 樹影 金泰一 부끄러워 안개 속에 붉은 볼 숨겨 꽃배암 담장 넘듯 살금살금 다가오는 발자욱 소리 꽃잎 벙그러지는 소리 솟대처럼 담장 높이 목련꽃 피워 올린 햇살 동네 아가씨와 바람났나 함박눈 다문다문 매화 가슴 콩닥콩닥 뜰 앞 앵두나무엔 열사흘 달 벗어 놓은 시어(詩語)떼들 내 마음 엿보려는 듯 반라의 몸으로 스트리킹 아이, 부끄러 * 경독재(耕讀齋) : 남제주군 성산읍 신풍리 소재, 한학자이며 향토사학가인 소농 오문복 선생 서재 * 지난 영등달 열사흘 날, 號를 받던 날의 감회 2006. 3. 16 2009. 9. 1.
어머니, 다시 봄이군요 어머니, 다시 봄이군요 김태일 어머니 어머니 빨래하시던 시냇가엔 철없는 아지랑이들 벌써 옷 훌훌 벗어 던져 허리 호리호리 솔바람 호리고 겨우내 옹알이하던 목련꽃 몽우리도 살빛 햇살에 안겨 다시 하얀 그리움 터트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정오 삼종기도 종소리에 어쩌다 떨어지는 녹나무 낙엽 한잎 품고 훌쩍 승천해버리셨습니다 봄은 다시 오는데 고향 바닷가에도 뒷동산 언덕에도 미륵이 재림하듯 봄이 밀려오는데 오늘도 이 가슴 속 어느 시냇가에 기대어 앉아 낙엽 되어 하늘거리는 어머니 어머니는 저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입니까 이 마음 속 흘러내리는 시냇물입니까 어머니 2006. 2. 24 2009. 9. 1.
봄은 다시 오지만 봄은 다시 오지만 김태일 멀리 수평선 열리며 오늘도 그대 살 섞은 바다엔 갈매기 날고 산에 들에 움 터지는 소리 파도치듯 밀려오는데 한라산은 산모처럼 새싹 주렁주렁 달고 설레이는데 고향 언덕엔 다시 봄이 쏟아지는데 그대, 가려는가 앵돌아진 입술 안으로 독촉장 같은 애증의 그림자 밀어 넣으며 밀레의 만종 소리 들리는 듯 말없이 두 눈 지그시 감은 그대 사랑 두고 꿈 두고 그대 홀로 눈 속 동백꽃 요절하듯 피안의 나라 찾아 헤르만 헷세의 안개 속으로 떠나려는가 아무리 삶이 어느 산골 흘러내리는 시냇물이라지만 어쩌다 숨어든 구름 한 점 품어 윤회 꿈꿀 수 있는 이 세상이 바로 피안의 나라인데 별빛 잠든 조약돌에 볼 비비며 흐르다 한숨처럼 터져 나오는 벚꽃 운무 안아 뒹굴 수 있는 이곳이 바로 꿈의 땅 젖과 꿀.. 2009. 9. 1.
그래, 그렇게 그래, 그렇게 김태일 입 꼭 다물었던 저 수평선 오늘따라 깃발처럼 구름 한 점 띄워놓고 실룩샐룩 미소 지어 하는 말, '피안의 나라 찾아 떠난다구? 그곳이야, 그곳. 그곳이 바로 피안의 나라라구.' 그래, 이렇게 사는거야 어쩌면 삶이란 빈 가슴에 외뿔 바람 한 점 흘러가는 것 무시로 날아드는 참새 입방아에 대나무 잎새마다 바람이 이는 이곳이 천국이지 먹구름 사이 살짝 내비친 햇살에도 삶의 환희 넘쳐 춤추며 노래하며 해반주그레 웃으며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마다 별빛 내리는 소리 들으며 모래알 알알이 열리는 천년제국에 갇혀 그래, 그렇게 2006. 2. 10 2009. 9. 1.
용두암에 이는 바람 용두암에 이는 바람 김태일 바람이었다 온 섬 하얗게 지우려 쏟아져 내리는 폭설을 한바다로 휘몰아 간 녀석은 바로 그 바람이었다 그 옛날 집채만 한 파도 안아 뒹굴다 어느 젊은 어부의 마지막 눈빛이 애처로워 그 시신 품어 뭍으로 오르는 순간 문득 해탈한 이름 없는 바람 제주바다 휩쓸어 물밀듯 밀어닥쳐 용 되어 승천하려는 백마의 목덜미 낚아채 아기장수의 꿈 집어삼킨 바람 산 넘어 바다 건너 구름 따라 방황하다 어느 뫼 들꽃 한 송이의 기도에 목이 메어 이 바위에 비껴 앉아 소리 없이 파닥이는 바람 오늘도 용두암 바닷가에서 한라산 먹구름 밀어내 봄 하나 품으려 바둥거리고 있는 난 어느 가슴 회오리치는 외곬 바람인가 * 용두암(龍頭岩) 전설 : 제주시 바닷가에 있는 10m 높이의 현무 암 바위에 얶힌 전설로서,.. 2009. 8. 26.
함박눈의 시위 함박눈의 시위 김태일 얼마나 한이 맺혔나 온 산야 함박눈 아스팔트 드러누어 알몸 시위 새파란 눈빛 번득인다 벚꽃 운무가 하늘하늘 폭포수 치렁치렁 하얀 나비가 나붓나붓 파도치듯 철썩철썩 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못 다한 사랑 한풀이 하듯 하늘과 땅이 한 몸 된 듯 삶과 죽음 하나 된 듯 그 가을의 비련인가 마을마다 고을마다 함박눈 소복소복 쌓이는 회한의 하소 새하얀 아우성 흩날린다 2005. 12. 12 2009.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