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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시>제주바다 숨비소리

바람의 탄생 - 김태일

by 숨비 소리 2016. 1. 1.

 

 

바람의 탄생

 

 

김태일

 

 

반쯤 열린 창으로

서늘한 바람이 한 모금 훅 가슴을 파고듭니다

저기 대나무 숲 속에 바람의 긴 머리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 바람은 고생대 설산에서 어슬렁대던 백곰의 깃털이었다

- 바람은 황야를 질주하던 유목민들의 말발굽에서 태어났다

- 바람이란 또 한 생을 아슬아슬 건너가는 새의 날개이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니다, 바람은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백성들의 한숨과 몽골로 끌려간 고려 궁녀들의 눈물과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처녀들의 통한이 모여 바람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바람은 뒤뜰 대나무 숲 속에서 유년의 그대와 내가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은 4.3 싹쓸이의 주술을 누군가 문득 흔들어댈 때 태어납니다

 

사르륵 대나무 잎새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저기 숲 속에 웬 사내가 몰래 숨어들어 두리번거립니다

산에서 며칠 굶었는지 퀭한 눈동자가 파랗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철렁 한 줄기 바람이 등줄기를 훑어 내립니다

가슴 속에 다시 바람이 탄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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