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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

꿈속 옛집엔 지금도 - 다층 2008 가을호

by 숨비 소리 2009. 9. 2.



꿈속 옛집엔 지금도

김태일


꿈속에 자꾸 어릴 적 살던 옛집이 아른아른 아른거린다. 아니, 무심코 길을 걸을 때나 어쩌다 잠시 깜박 졸고 있을 때도 그 옛집이 아릿아릿 떠오르곤 한다. 세월이 할퀴고 간 흔적처럼 무너져 내린 툇마루에 파도가 철썩이기도 하고 유랑하는 섬과 같이 아득히 멀어져 가기도 하는

쓰러져가는 허름한 초가삼간
모진 바람에 추녀 한 귀퉁이가 헤어진
어머니가 살던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는지
섬돌 위에 고무신 한 켤레가 덩그러니 놓여 있기도 하고
아무도 살지 않은 폐가 같기도 한
그런데도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렇다고 선뜻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는
어쩐지 가슴 무너져 내리는
지금은 헐어버린

꿈을 꾸고 나면 가슴 속엔 잿빛 바람이 불거나 강물이 휩쓸고 지나간 강변 멀구슬나무 가지처럼 허전한 정적이 흐르곤 한다. 지금도 그 꿈속 옛집은 내 의식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아 어서 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발걸음이 얼어붙었는지 갈 수가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전생처럼


2007.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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