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
김태일
그녀를 떠나려 바다로 향했다.
왠지 가슴이 텅 비어 바다로 달렸다.
길이란 길은 모두 옴팡밭 고구마 줄기마냥 섬 안에서만 뱅뱅 맴돌고 흙도 돌도 비바람에 시커멓게 타버린 그녀, 숨이 턱 막혀 도망치듯 그녀를 떠났다. 어느 날 마치 거사 준비라도 하듯 2차선 3차선으로 쏟아져 나온 골목길들이 사라봉 등성이에 모여 저 멀리 수평선의 아린 손짓을 따라 바다로 뛰어들던 바로 그날, 나는 허겁지겁 배에 올랐다. 배는 제주휘파람새소리 집어삼키는 뱃고동 길게 남기며 마파람처럼 서둘러 한바다로 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이는 건 바다가 아니었다. 그녀였다. 내가 그토록 떠나려 했던 그녀였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를 떠나야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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