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탈곡기 소리
김태일
나만 살았주
모두 박성내에서 콩 볶듯 쏴버렸주
시신은 사태 끝나고 이빨이나 옷가지 모양으로 찾았주
자복이 무슨 뜻인지 몰랐주
거기 가면 무조건 살려준대서 마을 사람들에 떠밀려
얼떨결에 트럭에 올랐주
누군가 속삭였주
아무리 큰 잘못이 있어도 자수하면 살려준다는데
마지막 지푸라기일지도 모른댔주
순간 어리버리 온몸이 오싹했주
기회를 엿보다 트럭이 진드르에 접어들 즈음
어스름에 몸을 기대어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렸주
죽을힘을 다하여 달렸주
너무 숨이 차 보리밭 돌담 틈에 몸을 숨겼주
고장 난 탈곡기처럼 타닥타닥
위아래 이빨이 경련을 일으켜 마주쳤주
엉겁결에 보리를 한 무더기 뽑아 흙과 함께
이 입을 틀어막았주
주변 보리들이 작두날에 잘리듯 잘려 나갔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주
돌담 틈으로 혈안이 되어 나를 찾는 모습이 보였주
4ㆍ3 나던 해 초겨울이었주
그 길로 산에 올랐주
똑똑한 사람들 다 죽고 나같이 멍청한 사람만 살았주
나만 살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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